독서 기록: 나의 인생책, 헤르만 헤세 <데미안>

2017. 3. 13. 18:07문화생활 기록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데미안 Demian>

 

2017.03

 


 

<데미안>을 읽게된 것은 나의 부끄러움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읽지 않았던 분야 혹은 작가의 책을 다양하게 섭렵해보겠노라고 시작했던 독서모임이 어느덧 1년 반이 지났는데도, 난 아직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 내가 관심있는 책에서 제자리 걸음이었다.

 

그러던 중 책 추천해주는 책방 <최인아 책방>에 들렀다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업어왔다.

 

처음 싱클레어의 이야기들은 새로웠지만 흥미를 돋우진 못했다. 하지만, 데미안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달라졌다. 어리지만 어리지 않은 그의 행동들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참지 못하게 만들었고, 어느덧 나는 책에 푹빠져 있었다.

 


 

나는 책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내가 느꼈던 감정들, 생각들과 함께 기록하여 기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환했다. 모든 것이 흐르는 광채로 에워싸여 있었다. 모든 것이 놀라웠다. 신성하고 깨끗했다. 그리고 모든 것, 모든 것이 어제만 해도, 몇 시간 전만 해도 나의 것이었고, 나를 기다렸는데 지금은, 지금 이 시각에는, 타락하고 저주받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나를 밀쳐내고 있었다.

 

 

싱클레어는 어렸을 적부터 두 개의 다른 세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는 선으로 대표되는 부모님의 세계였고, 다른 하나는 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선과는 분명히 다른 또 하나의 세계였다. 싱클레어는 부모님의 자식이었기에 선의 세계에 있다고 믿었지만, 그의 관심은 항상 다른 세계였다. 그러던 중 그는 작은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그 거짓말은 그에게 있어 자신의 세계가 달라지는 큰 사건이 된다. 사실 이제 어른이 된 내 눈으로 봤을 때 그가 한 거짓말은 어린아이가 자존심때문에 할 수 있는 그런 사소한 것이었다. 싱클레어의 부모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싱클레어에게 그것은 사소한 것 이상이었고, 그에게 전부가 된다. 그 작은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결국 그의 족쇄가 되어버린다. 앞의 인용구는 싱클레어가 한 거짓말이 자신에게 독이 되었다는 것을 안 순간을 묘사한 부분이다. 내가 이 부분이 와닿았던 것은 한 번쯤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싱클레어와 같이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너무나 익숙했던 나의 세계가, 혹은 지루하여 거기 있는지도 모르고 살던 나의 세계가 아주 사소한 실수 혹은 사건으로 인하여 더이상 나의 세계가 아니라고 느껴지는 순간. 이제는 나의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그리워지고 되돌아가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미묘한 감정선을 헤세는 이렇게 전달하고 있었다.

 


 

내가 한번도 내 동행자들과 하나가 되지 않았다는 것, 그들 가운데서 늘 외로웠고 그래서 그렇게까지 괴로웠다는 것,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운명을 동경했고, 운명을 두려워했지만, 운명은 늘 거기 있었다. 늘 내 위에 있었다.

 

 


 

 

 자신을 남들과 비교해서는 안 돼. 자연이 자네를 박쥐로 만들어 놓았다면, 자신을 타조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돼. 더러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자신을 나무라지. 그런 나무람을 그만두어야 하네. 불을 들여다보게, 구름을 바라보게. 예감들이 떠오르고 자네 영혼 속에서 목소리들이 말하기 시작하거든 곧바로 자신을 그 목소리에 맡기고 묻질랑 말도록.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님 혹은 그 어떤 하느님의 마음에 들까 하고 말이야. 그런 물음이 자신을 망치는 거야. 그런 물음들 때문에 인도로 올라서는 것이며 화석이 되어가는 거지.

 

 

그럴 때가 있다. 책을 읽다보면 어느 한 구절이 방황하는 자신에게 해주는 말인 것 같을 때가. 이 구절이 나에게 그러지 않았나 싶다. 근 1년동안 행복에 대한 고민을 많이했는데 결론은 조금은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큰 그릇이 되지 못한 나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쓰면 그만큼 나에게도 신경을 써주길 바랬다. 그것들은 결국 상대방에 대한 섭섭함으로 변질되었고, 관계에 있어 독이 되었다. 상대방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조금 이기적이어야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배려를 하지 못할 것이라면, 나를 상대에게 맞추는 것이 아닌 내가 나로서 남도록 행동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뒤 나에겐 마음의 평화가 왔고, 지금까지 그럭저럭 불운하다고 느끼지 않고 잘지내고 있다. 이 문구는 나에게 확신을 주었다. 내가 나로 남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 결국 자신을 망치게 된다는 확신 말이다. 나부터 사랑하자. 그리고 사랑을 주자. 그것이 내 방황의 결론이었다.

 


 

  악의 없는 인간도 살면서 한 번쯤 혹은 몇 번은 경건과 감사하는 아름다운 도덕과 갈등에 빠지는 일을 겪기 마련이다. 누구든 한 번은 자신을 아버지로부터, 스승들로부터 갈라놓는 걸음을 떼어야 한다. 누구든 고독의 혹독함을 조금은 느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걸 잘 견딜 수 없어 다시 밑으로 기어든다 하더라도.

 

 

 

 

우리들 마음 속의 이끌어가는 물결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멀어져 가려함을 갑자기 알아차렸다는 생각이 들 때 말이다. 거기서는 친구이자 스승을 거부하는 생각 하나하나가 독침으로 우리 자신의 심장을 찌른다. 거기서는 방어의 타격 하나하나가 자기 자신의 얼굴에 적중한다. 거기서는 유효한 도덕 하나를 자신의 마음 속에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충직하지 못함>과 <배은망덕>이라는 이름이 떠오른다. 치욕적인 기억과 낙인처럼.

 

 

 

앞서 언급한 내 고민들의 연장선상이었다. 그 상대방은 종종 부모님이 되기도 했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존재인 부모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고, 때때로 나의 모습이 부모님의 마음에 들지 않아 갈등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부모님의 걱정이 항상 나의 발전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의 가장 큰 위로와 버팀목이 되주던 존재가 나의 족쇄가 되기도 하였다. 이런 갈등이 지속되자, 나의 자존감도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반항하기 시작했다. 물론 거친 반항은 아니었다. 나의 삶을 되찾는 정도의 반항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이기심으로 나의 행복을 되찾는 과정이었다. 지금 나와 부모님의 관계는 문제가 없다. 가끔 나에게 섭섭함을 가지실 때도 있지만 나의 결정을 존중해주신다. 나 또한, 내가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모님 탓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기심이 불효가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필터를 거치지 못한 나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는 게 아닐까 걱정하기도 한다. 이 두 문구는 그런 내 찰나의 생각들을 잘 잡아내고 있었다.


 

 

  어디서나 그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 속 그 어딘가에서 <자유>와 <행복>을 찾았다.

 

 

 

그 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지는 않았나요? 혹시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았던가요?

 

 

 

 

자신의 꿈을 찾아내야 해요. 그러면 길은 쉬워지지요.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꿈은 없어요. 어느 꿈이든 새 꿈으로 교체되지요. 그러니 어느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데미안>에는 헤르만 헤세의 인생이 담겨 있었다. 정말 자서전적 내용이라는 것이 아니라,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실제로 겪어보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그런 인간의 고찰들과 감정들이었다. 나는 헤르만 헤세의 삶이 궁금해졌고, 살펴보았다. 헤세는 말 그대로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다. 시인이 되고 싶어 신학교에서 탈출하고, 15세의 어린 나이에 자살기도를 했으며, 서점의 견습점원과 시계공으로 일도 했다. 9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였고, 독일 국적에서 스위스로 새로이 국적을 취득했다. 인도 여행을 하며 동양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으며, 자국이었던 독일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죽음과 아내가 정신병에 걸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신분석 연구를 하였으며, 나치에게 저항했고, 다양한 작품들을 낳았다. <데미안>은 그의 나이 마흔이 넘어서 탄생한 작품이다. 이런 삶을 살아온 그였기에 작품의 깊이는 필연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데미안>은 성장소설이라고 한다. 성장소설은 청소년소설이라고 생각했던 내 어리석음에 통탄했다. 나는 아직도 성장하고 있기에 이리도 <데미안>을 읽고 감동을 받았나 보다.

 

책을 다 읽어간다는 것의 아쉬움을 느낀 적이 언제였던가. 책의 끝이 없기를 바란적이 있었던가. 책을 다 읽고 전율을 느낀 적은 몇 번이나 있었던가. 벅차올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적은 있었던가. 이 책은 그렇게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