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새벽 4시 사이렌과 긴급대피

2018. 3. 11. 07:54내가 사랑하는 삶

허비를 기다리다 먼저 잠이 들었다. 그러다 허비가 왔고, 비몽사몽 이제 집에 왔냐고 인사를 하고 다시 잠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잠결에 듣기도 했고, 뭐라는지 잘 모르겠는 안내와 함께 사이렌이 반복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부스스 일어나 이게 지금 무슨일이지? 하고 창문 밖을 봤다. 불이 켜져있거나 소란스러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뭐지? 찜찜한 기분에 현관문을 열었다. 나와같이 당황한 모습의 미국인이 복도에 서있었다. 눈이 마주쳐 둘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어리둥절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다급한 상황은 아닌듯한데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좀 당황스러웠다. 그러다 복도 끝에서 어린이가 있는 가족이 옷을 입고 나오는게 보였다. 복도에서 마주쳤던 미국인과 나는 우리도 옷 입고 나가야할 것 같다고 하며 헤어졌다.



나도 서둘러 허비를 깨운 뒤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왔다. 비상사태라 판단하고 바로 비상계단으로 이동하여 내려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침착하게 계단을 내려가고있었다. 계단에서 제일 먼저 만난 노부부는 각자 반려견 한 마리씩 안고 있었다. 강아지가 놀랄까봐 따뜻하게 안고는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상당히 고층인 아파트에서 한참을 내려가 로비층에 도착하니 이미 옷을 대충입고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가족들도 많이 보였다. 급하게 나오느라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이 추운 날씨에 반팔 반바지를 입고 나온 사람들고 꽤 있었다.




우리도 밖으로 나가보자며 나가보니 눈에 들어온건 소방차 3대와 경찰차 1대. 소방차 3대나 출동할 정도면 대체 무슨일이 일어난거지? 하고 위를 바라봤다. 약 3개층에서 사이렌 소리와 맞춰 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먼저 대피하고 있던 주민에게 진짜 무슨일이 일어난건지 물었지만 무슨상황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불길이 솟거나 비명소리가 들린다거나 그런건 없고, 다들 침착했다.


곧이어 소방관들이 건물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다행이도 부상자는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들리기엔 이 새벽에 파티가 있었단다. 그 파티에서 소동이 있었던 것 같다. 허비가 새벽에 퇴근하고 엘레베이터를 탔는데 몇 몇 사람을 만났었다고 했다. 다들 술에 취한건지 대마를 한건지 상태가 매우 안좋아보여서 다른 엘레베이터 탈 걸 후회했다고 했다.




상황이 종료된 뒤 사람들은 침착하게 줄을 서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큰 일 없이 마무리 되어 다행이었고, 안그래도 수면부족인 허비가 잠도 제대로 못자고 이런일이 생겨서 안타까웠다. 이게 다시 잠들기 전 있었던 일.


눈을 뜨고 하루를 보내면서 왠지 자꾸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복도 끝 집에서 아이 옷을 잘 챙겨입혀 나오던 가족의 모습. 엘레베이터를 타고 다시 집으로 갈때 마주쳤는데 억양으로 보아 영국인 가족이었다. 아이가 놀라지 않게, 또 위험한 상황이 없도록 차분하고 침착하게 웃는 얼굴로 빠르게 대피했던 모습이 자꾸 생각난다.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나와 처음 마주쳤던 미국인은 여전히 어리둥절하며 아무런 대처도 못하고 있었겠지.


안전불감증. 살면서 위험한 상황에 처해본 적도 없었고, 실제로 대비해야하는 상황도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안전불감증은 남의 이야기이고, 나의 이야기는 아니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가족들의 모습과 나의 행동이 대조적으로 보이며 자꾸 뇌리에 박힌다.


나도 결코 늦게 대피한 것도 아니고, 대피했던 인원들을 보면 분명 사이렌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자고 있었던 가족들도 많았을 것이다. 같은 층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빠르게 대처했던 가족이 생각나 나의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주의해도 부족하지 않은 나와 나의 가족의 안전.


다른 의미의 다양한 경험을 하는 미국생활. 나는 배우고 있는 중이다.